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온 칼 (문단 편집) == 2번째 파병 ==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고 1년간 전투 임무 대신 교관 임무를 맡은 칼은 1943년 말에 다시 전선에 복귀해 과달카날에서 자신이 소속된 비행대였던 VMF-223의 비행대장에 자원했고 와일드캣이 아닌 신형 F4U 콜세어로 2대의 전과를 더 추가하지만 아쉽게도 더 이상의 격추를 기록하지는 못했다. 칼은 2차 대전 동안 미 해병대원으로서는 7위에 해당하는18.5대의 격추 기록을 세웠으며 해군 십자훈장을 미드웨이와 과달카날 전역에서 각각 수여받았다. 한국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고 미 해병대의 테스트 파일럿으로 음속 돌파에 도전하는 더글라스 스카이스트릭(Douglas D-558 Skystreak) 같은 실험기들을 조종한 칼은 캑터스 비행대원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군 경력을 쌓아가게 된다. 베트남전 무렵에는 소장이 된 마리온 칼 장군은 남베트남에 파병된 제1해병 원정군의 군용기들을 진두지휘했다. 베트남전에서 칼의 지휘를 받은 미 해병항공대는 공중전을 겪을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지상지원 임무에서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제2의 디엔비엔푸'라고 불리던 케산 포위전에서 위기에 처한 미군들을 사실상 공중지원만으로 요새의 포위를 풀어버려 현대 공군력의 위력을 새삼 만방에 알렸다. 이런 해병대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전은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정치적인 딜레마에 허우적댄 미국의 패배로 끝났으며, 이에 실망한 마리온 칼 소장은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군복을 벗고 전역했다. 퇴역한 후에는 전투 조종사와 테스트 파일럿으로서 자신이 겪었던 일화를 1994년에 친구 배럿 틸먼(Barrett Tillman)과 함께 Pushing the Envelope라는 제목의 자서전으로 엮어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